
1980년 대 사이버 펑크의 명작으로 불리웠고, 한때 수 많은 만화가 지망생들의 교과서처럼 알려졌던 오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1권' 을 드디어 한국판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최근에 국내 시장에 출판된 책이 아닌데다 정식 한글판도 아니지만 세월을 거쳐 이런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훌륭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나 책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잠깐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보시다시피 이건 해적판 입니다. '1권' 이라는 프린팅 밑에 보시면 'KINO Special Price 4000WON' 이라는 글씨를 볼 수 있는데 이는 10년도 더 된 물건 치고는 살당히 비싼 가격에 책정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미 소장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뒤늦게 헌책방에서 2000원 주고 구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표지의 바코드 스터커는 이 책이 대여점에 납품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해줍니다.
작품의 1권 부제는 '테츠오' 로 되어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초반에는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무리들이 속속 등장하지만 정작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들 무리의 일부인 카네다 쇼타로와 테츠오 둘 뿐이죠. 카네다가 등장하는 첫 씬은 왠지 모르게 작화붕괴의 느낌이 나긴 하지만 이들 무리는 불법으로 조합된 흥분제를 먹고 도심을 질주하며 주색에 빠지는 전형적인 미래형 불량소년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속의 모든 문제와 갈등은 바로 이 정체불명의 괴물로 인해 야기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체격에 노인형 얼굴...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이 존재는 고속도로를 폭주하던 주인공 무리 앞에 불쑥 나타나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다행히 카네다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이 괴물의 어택을 받은 테츠오는 오토바이 전복사고라는 끔찍한 일을 겪게되며 병원으로 후송되게 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별 탈이 없어 보이지만...
알고보니 이 정체불명의 괴물은 국가에서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던 초능력 괴물이며, 설상 가상으로 이들 무리는 점점 반복된 실험으로 인하여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특히나 정부의 주요 예산이 그 쪽에 투입되었죠.) 21세기의 네오도쿄에서는 바로 이런 괴물들의 양성을 위해 여러차례 약물실험과 신체검사로 멀쩡한 사람을 괴물로 각성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허나 가공할 만한 수준의 엄청난 초능력을 가진 이들은 '캡슐알약' 없이는 절대 밖에서 살 수 없는 불행한 존재들이죠.
정부와 군에서 그토록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아키라' 라는 존재인데...사실 1권에서는 이것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내용상으로는 또다른 초능력 괴물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엄청난 크기의 유치원으로 묘사된 이 능력자들의 터전은 지적수준이 아이수준으로 멈춘, 혹은 어린 나이에 실험을 당해 각성하겓된 무리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몇 십년이나 앞선 노하를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끔찍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이제 주목해야 할 문제는 초반에 사고로 부상을 당했던 테츠오가 이들 정부의 산하에서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테츠오 역시 그동안 남용했던 약물로 인해 이러한 기질을 가지게 된 능력자였던 것입니다. 단기간의 실험동안 사람을 죽일 위력을 가지게 된 테츠오는 누가 봐도 뻔히 '쟤가 아키라 아냐?' 라는 당연한 짐작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그나저나 해적판 답게 화이트질도 매우 정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보지 못해서인지 몇 페이지가 누락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구요.
병원을 탈출하여 동네깡패들을 제압하고 단번에 우두머리가 된 테츠오는 이미 예전에 '카네다의 절친' 으로 묘사되었던 그 인물이 아닙니다. 급작스런 각성과 이를 일으키기 위해 그동안 이루어졌던 생체실험으로 인해 이미 그의 인성은 난폭하고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쨌든 실험으로 인한 고질적인 두통을 호소하던 테츠오는 깡패들을 협박하여 50만 원어치의 흥분제를 먹고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1권 내용의 마지막입니다.
사실 극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카네다 역시 많은 활약을 하게 되는데 그는 정부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무리들과 엮여 결국 이들과 대립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초반에 만났던 그 괴물에게 던져 준 캡슐을 가로채어 성분검사를 의뢰하기도 하고 이로인해 쫒기는 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전형적인 설정처럼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들 조직이 찾는 존재 역시 바로 '아키라' 라는 것이죠. '아키라' 라는 존재를 둘러 싼 정부와 비정부조직간의 갈등은 다음 권의 주요 갈등 포인트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침 집에 일본판 원서 '3권' 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어 실력의 부재로 인해 아예 포장조차 뜯지 못하고 수 년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만화책은 1권부터 보지 않으면 멋대로의 상상이 작품의 감상을 방해하는 터라 오히려 1권의 내용인식은 매우 좋은 경험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십 수년 전 만해도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만화테크닉잡지(대표적으로 코믹테크)에서의 평점은 항상 만 점이었고 주변의 만화 좀 본다는 사람들이나 평론가들의 애니관련 서적에는 SF와 '사이버펑크' 를 언급하는 경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작품을 예로 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내에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았던 이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감상했을리는 없다는 것이지요. 막상 감상했던 사람들이 많지 않은 탓에 지나치게 부각되거나 과장된 평가도 분명 존재합니다.

일단 1권을 감상하고 희미하게나마 2권을 보았던 저로서는 상당한 영감과 감동을 준 작품이기는 했지만 SF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게 초능력자라는 소재는 어딘가 사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흥미는 느껴지지만 이후에 등장한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사실 심심한 소재임에는 분명하죠. 더군다나 캐릭터들도 미남이 아닙니닷!
하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그 소재나 줄거리 보다 이를 얼마나 잘 짜여진 연출과 시나리오로 묘사하느냐라는 부분에 있습니다. 잠깐 몇 컷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컷 하나하나가 상당한 기교와 연출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200여 페이지에 채워진 수 많은 컷들은 하나하나가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인데 예전에는 이를 가지고 레이아웃과 구도, 그리고 작화론의 교과서처럼 분석한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이니 말이죠.

하지만 일단 작품 자체는 너무 딱딱합니다. 상당히 잘 짜여진 모습이지만 그에비해 작가의 감성은 지나치게 절재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죠. 또한 그림체와 캐릭터 디자인 역시 80년 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아쉽기도 하구요. 21세기의 미래를 배경으로 80년 대 복장과 스타일이라니...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개그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원작만화 전 권을 봐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보는 시각을 넓혀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나 화려한 그림체, 그리고 독자의 이목을 끌 만한 화려한 설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작가의 노련한 '실력' 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한때 국내에서도 이러한 장르를 시도하려는 몇몇 작가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장르의 특성답게 '무미건조하고 암울한' 그런 작품이 된 사례가 많았던 절차를 본다면 바로 그 이유중 하나를 '역량의 차이' 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드래곤볼이나 원피스처럼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각성자 테츠오와 주인공 카네다와의 갈등 관계와 암울한 미래의 일본상황은 독자의 취향에 따라서 상당히 극단적이고도 괴이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여기서 감성의 절제와 SF식의 방대한 해석으로 작품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아 주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매력은 이것 뿐만이 아니겠죠.

그나저나 책 겉표지를 보면 이런 문구와 그림이 눈에띄게 됩니다. 앞면이나 뒷면이나 모두 같은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데 앞앞표지에는 영어로, 그리고 뒷표지에는 중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중국에서 온 것인지 원래 책의 구성이 이런 것인지는 나중에 확인해 보아야 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 말고도 XX보이(스팀보이 아닙니다...) 라는 명칭으로 발매된 해적판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구해보고 싶습니다. 편집의 정도가 얼마나 심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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